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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국권은 이렇게 빼앗겼다.

1910년, 국권은 이렇게 빼앗겼다

열강의 탐욕과 조선의 외교 고립

1880년대 후반부터 한일병합(1910년) 전후까지, 조선(대한제국)과 열강(미국·영국·러시아·중국·일본 등)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개괄적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각국이 어떻게 동아시아 외교·정세에 관여했는지, 그리고 조선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순차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1880년대 후반: 조선의 문호 개방과 열강 진출

  1.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과 잇달아 조약을 체결.

    •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공식적으로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됨.

    • 이 시기 조선은 서양 군사·기술 도입, 근대식 교육·제도 개혁을 모색했으나, 국내 정치 세력 간 갈등(척사파 vs 개화파)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함.

  2.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의 조약

    • 조선은 미국 외에도 영국(1883), 독일(1883), 러시아(1884) 등과 연이어 통상 조약을 맺으며 문호를 점차 개방.

    • 이는 조선이 자주 외교를 통해 “균형외교”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각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조선 내부정치는 더욱 복잡해짐.

  3. 청국(중국)과의 관계

    • 당시 조선은 오랜 사대관계 때문에 청(중국)의 내정간섭을 받고 있었고, 실제로 조선에 ‘청국 군대’와 고문단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함.

    • 조선에서는 개화파 일부가 ‘청국 간섭 배제’를 외치며 일본·서구 세력과 교류를 도모했으나, 청국이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임.

    • 1884년 갑신정변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며, 이는 실패로 끝나면서 오히려 청국의 간섭이 한층 강화되는 계기가 됨.


2. 1890년대: 동아시아 정세 급변과 열강 경쟁

  1. 청일전쟁(1894~1895)과 조선

    •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국에 지원군을 요청. 이를 계기로 일본도 출병하면서 청일전쟁이 터짐.

    • 결과: 일본의 승리. 시모노세키조약(1895)으로 청국의 종주권이 사실상 부인되고, 조선이 ‘자주 독립 국가’임이 명문화됨(표면적으론).

    •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섭할 발판을 마련했고, 이를 견제하려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1895)’이 일어나기도 함.

  2. 일본과 러시아의 경쟁 심화

    •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서의 친러파, 친일파 대립이 심해졌고, 고종과 민비(명성황후) 세력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함.

    •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을 일으켜 조선 정권을 강제로 뒤흔들었고, 이로 인해 조선 내부의 반일 감정이 커짐.

  3. 영국·미국의 태도

    • 영국과 미국은 동아시아 정세에서 자신들의 상업 이권과 통상 확장을 중시했으며, 조선의 내정 문제보다는 **‘열린 시장 확보’**에 주목.

    •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경계한 영국은, 189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의 협력을 모색하기 시작함(훗날 1902년 영일동맹 체결).

  4. 대한제국 선포(1897)

    • 1897년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 자주 독립을 표방.

    • 광무개혁 등을 시도하며 근대화·자주화를 모색했으나, 외교·군사적 기반이 약해 결국 일본의 영향력에 점차 휘말리게 됨.


3. 1900년 전후: 러일 경쟁 격화와 열강의 동아시아 각축

  1. 러일전쟁(1904~1905)

    • 조선과 만주 지역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함.

    • 영국은 러시아 견제 차원에서 1902년 영일동맹을 맺어 사실상 일본을 지지하고, 미국 또한 러시아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로 일본에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

    • 결과적으로 일본이 승리하며, 러시아의 동아시아 영향력은 크게 약화.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1905)으로 만주 남부와 조선에 대한 우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됨.

  2.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

    • 러일전쟁 후, 일본은 미국과 비밀 교섭을 하여 서로의 식민지 지배를 묵인한다는 합의를 맺음.

    • 즉,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으로, 조선의 외교적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됨.

  3. 을사늑약(1905) 체결

    •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조선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외교권을 박탈하여 사실상 보호국화함.

    • 영국·미국 등 열강은 이미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묵인한 상태였기 때문에, 을사늑약에 적극 개입하거나 반대하지 않음.

    • 대한제국 고종이 국제사회(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1907) 등으로 호소했으나, 열강의 반응은 냉담.


4. 한일합방(1910) 전후 열강의 태도

  1.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1907) → 한일병합(1910)

    • 1907년 고종이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으나 실패. 오히려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키고 내정을 전면 장악.

    •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되었으나, 이는 일본 내부에서 “조선을 병합해야 한다”는 여론을 더 부추기는 결과가 됨.

    •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이 소멸,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함.

  2. 영국과 미국의 방관

    • 영일동맹(1902~1923)으로 일본과 영국은 상호 이익을 공유하고 있었고, 영국은 러시아가 만주·한반도에서 세력을 넓히는 것을 저지할 ‘동맹국’으로 일본을 활용하길 원했음.

    • 미국 또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묵인하는 대신, 필리핀에서의 이권을 안정적으로 유지.

    • 따라서, 한일병합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영미 열강은 별다른 반대나 제지를 하지 않았음.

  3.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

    • 러시아는 이미 1905년 전쟁 패배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고, 이후 내정(혁명 사태 등)과 발트·유럽 지역 문제로 여유가 없었음.

    • 청나라는 1895년 청일전쟁 패배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한 뒤, 스스로도 열강의 이권 침탈에 시달리던 시기(의화단 운동 등). 조선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없었음.

    • 1910년 한일병합에 대해 중국(청 정부)은 이미 손을 뗀 상태였고, 열강의 국제질서 하에서 크게 개입하지 못함.


5. 요약: 한일병합 직전의 국제정세와 조선의 외교적 고립

  1. 영국

    •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대륙 진출을 사실상 지원. 러시아를 견제하는 파트너로 일본을 활용. 조선 문제에는 적극 개입 X.

  2.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 자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가.

    • 미국 내 반일 여론도 일부 존재했으나(선교사 등), 국익 우선의 외교 정책 아래 조선 보호나 개입 의사 없음.

  3. 러시아

    • 러일전쟁 패배 후 극동에서 세력 급감. 조선을 둘러싼 영향력 상실.

    • 자국 내 혁명(1905년, 1917년 2월·10월 혁명) 등으로 동아시아 문제에 신경 쓸 여력 부족.

  4. 중국(청나라)

    • 청일전쟁(1894~1895) 패배로 조선 종주권 상실. 의화단 운동(1900) 이후 열강 분할 압력에 시달림.

    • 만주 지역 이권 문제로 일본·러시아와 대립했으나, 조선 문제에는 실질적 개입 불가능.

  5. 일본

    • 청일전쟁(1895)과 러일전쟁(1905) 승리로 동아시아에서 경쟁자를 밀어냄.

    •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을 통해 열강의 묵인을 받아 조선 병합을 완수(1910).

  6. 조선(대한제국)

    •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개혁 등 자주화 노력했으나, 열강의 각축 속에서 정치·군사·재정적 기반이 취약.

    • 고종의 외교적 시도(헤이그 특사 파견 등)도 열강의 외면 속에 무위로 끝나고, 을사늑약(1905) → 한일병합(1910)으로 국권 상실.


6. 결론

1880년대 후반부터 1910년 한일병합에 이르는 시기는, 동아시아 질서가 급속하게 재편되며 열강들이 이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때입니다.

  • 영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은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했습니다.

  • 러시아중국(청나라)은 각각 전쟁 패배와 내정 혼란으로 조선을 도울 여력이나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 그 결과 일본은 청일·러일전쟁에서의 승리, 영일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강대국의 묵인과 협조를 얻어, 1910년에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할 수 있었습니다.

즉, 국제정세에서 고립된 대한제국이 외교적·군사적 자립 기반을 갖지 못한 채,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맞서지 못하고 결국 식민지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당시 영국·미국·러시아·중국 등 열강이 모두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조선의 국권 상실을 방관하거나 묵인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작은 나라가 국제정세 속에서 어떻게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 있는지, 또한 주변 열강이 자신의 국가이익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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